BLIND SPOT - 제이(第二), 식민의 추억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하였다고 알려져 있는 음악가들이 작사, 작곡한 교가들을 서울, 광주, 창원 세 지역을 중심으로 수집 후, 높은 사용빈도의 단어들 추출하여 지우개에 조각

지우개 조각, 가변크기, 2019

 

BLIND SPOT - The Second, Memories of Colonization

eraser sculpture, variable size,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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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확실하고 복잡한 삶의 조건들과 층위에 놓인 실존적 인간으로서, 자명하다고 여겨지는 현실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의식하는 것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유의미한 시도이며, 그 자체로 세계에 대한 저항이 된다고 믿는다. 비록 인간은 딛고 선 풍경 밖을 벗어날 수 없을지 몰라도, 전유하고 있는 일상을 역사적 맥락에 위치시켜 보고, 이면의 가치를 환기해 봄으로써 그 자신이 내딛고 있는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는 사회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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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고, 보이지만 보이지 않고, 조명 받지 못하고, 쓰임 받지 못하는 사각지대(BLIND SPOT)라는 공간은 소외의 다른 이름이다. <BLIND SPOT> 연작은 사각지대가 물리적인 장소 개념을 넘어서서 우리 일상의 사회적 풍경으로, 관념적인 담론으로 전이됨에 주목한다. 부조리한 사회 문제들은 인권의 사각지대, 윤리의 사각지대, 정치의 사각지대, 교육의 사각지대, 역사의 사각지대 등과 같은 모습으로 변형되어 우리 삶에 집단적인 외상으로 생채기를 남긴다. <BLIND SPOT - 제이(第二), 식민의 추억>은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하였다고 알려져 있는 음악가들이 작사, 작곡한 교가들을 수집 후, 높은 사용빈도의 단어들을 추출하여 지우개에 새긴 작업으로, 식민의 풍경을 전복하여 일상의 기념비로 재맥락화하기를 시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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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주의는, 식민 지배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고 영속화 하는 도구로, 조선인의 저항을 통제하는 이데올로기적 통치 수단으로 '교육'을 이용하여,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우민화(愚民化)’라는 궁극의 목적을 달성할 것을 바라 마지 않았다. 해방이 된 이후에는 미군정이 장악하여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관철하였고, 잇따른 군사 독재 정권은 총독부의 시학(視學)을 담당했던 친일 부역자들을 재등용 및 결탁하여 반민족적이고 비민주적인 교육을 강화시켰다. 이어, 외세 의존적 경제 구조에서 야기되는 계급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반민중적 교육, 분단 상황을 고착화하는 반통일적 교육, 그로 인한 자본주의 계급에 따른 교육 기회의 불평등, 신자유주의 체제 하 경쟁 위주의 획일화된 교육 풍토, 전근대적 충효 이데올로기 등 제국주의 식민 지배 교육의 유산들은 고스란히 오늘날의 한국 교육 현장에 온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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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 지배, 전쟁, 분단으로 인한 단절된 역사 의식과 상실된 정체성의 부재를 메우기 위해, 국가주의적 기획차원으로 모든 학교들에 전일적으로 배치된 것이 바로, 국민교육헌장, 교훈, 교가, 교표, 동상과 같은 기념물들과 상징물들이다. 교가는 시대의 정신적 가치, 국가의 통치 이념, 건학 이념이나 교육 목표를 반영한다. 또한 마땅히 지녀야 한다고 판단되어지는 보편적 가치와 길러 내고자 하는 이상적 인간상을 제시한다. 즉, 당시 사회의 세계관과 이데올로기에 따라 특정한 의식을 형성하고, 강화하는 것에 역점을 둔다고 할 수 있다. 아름다운 구성과 비유 체계,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의 정기를 받아 인류 공영을 위해 조국의 역군이 될 것을 종용하고 고양시키는 가사는 대단히 빛나는 뜻과 가치가 담긴 고귀한 규율이 아닐 수 없다. 교가는, 국가를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인간의 정신과 신체를 재단하고 표준화(標準化)하여 충량한 국민을 양성할 것을 민족주의라는 외피로 감동적으로 노래하는, 제국주의적 희생의 가치를 녹여내는 데에 적절한 형식적 수단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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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植民)’을 사유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조선인으로 하여금 ‘독립(獨立)’이라는 단어를 박탈시키도록 어떻게 잠식해 왔는가. 우리 교육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식민 지배의 역사적 토대 위에 놓여져 있다면 ‘지금여기’의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고 전승해야 하는가. ‘식민’이라는 말은 정신과 태도의 모든 억압과 소외를 함의한다. 주체성을 상실하도록 속박하던 시기 만들어진 대부분의 교가들이 친일 협력 음악가들의 유산이라는 사실이 결코 우연은 아닐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기념화(紀念化)’ 한다는 것, 때로는 어떠한 사안을 완결된 기억 속에서 더이상 소환하지 않을 것임을, 더이상의 논의를 멈추고 문제 삼지 않을 것임을 표명하고 선고하는 것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이데올로기적 기표로 작동되어 온 권력적 언어의 기념비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탈락되고, 제한되고, 검열되고, 축소되어 그 힘과 목소리를 잃었을 무수한 노랫말들을 떠올려 본다. 가변적이고, 영속적이지 않은 지우개라는 물성의 토대 위에 유희적이고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기록함으로써 전복을 시도하는 것은 배제되었던 역사, 시선과 태도, 삶의 요소들을 본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는 관념의 기념 행위이다. 우리가 자라면서 익숙하게 학습해 온 텍스트들을 삭제하고, 각인하고, 수정하고, 박제하고, 애도하고, 재의미화하여 사소한 것들을 위하여 헌사할 때, 비로소 자기 인식을 바탕으로 주체적인 의식과 수용이 가능해지지 않을까 하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거대한 풍경들에 대한 작은 몸부림과, 고유의 속도로 일상을 지켜 내려는 작은 저항의 힘을, 믿어보려는 것이다.